한국생명학연구원 대구 청소년 종합상담실

 

 

생명학 자료실

문서 자료실

 

 

 

 

 

 

2006/9/6(수)
생명학의 미래를 생각한다  
생명학의 미래를 생각한다 - 지구 살림살이를 위한 생명학

이기상(한국외국어대/철학)

1. 우리 시대의 화두, <생명>

1) 60억 인류의 평화로운 더불어 삶
21세기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지구촌의 사람들은 흥분과 기대 속에 전 지구를 첨단 매체로 연결한 요란한 축제와 함께 시끌벅적하게 맞이하였다. 한 단계 성숙한 세계시민으로서 인종과 신념 그리고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모두가 함께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지구촌 건설을 다짐하는 숙연한 계기도 되었다. 그런데 그런 평화의 분위기는 채 일년도 넘기지 못하고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세계기술문명과 자본주의시장의 상징이며 심장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테러를 당해 낡은 조립식 건물처럼 힘없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지구촌의 엘리트임을 자랑하는, 수십 개국에서 선발된 수천 명이 넘는 자본주의의 첨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평화를 다짐하던 21세기 초의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고 전쟁의 기운과 테러의 공포가 전 세계를 휩싸고 있다. 최첨단 무기들이 효율적으로 인간들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집결되고 있다. 최첨단 과학기술이 몽땅 동원되어도 전 세계에서 기아로,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인간생명을 살리기에 역부족인데 오히려 그 반대로 사람목숨을 빼앗는 데 총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로 시작된 새 천년은 그렇지 않아도 인류에게는 그 미래가 불안한, 많은 문제를 배태하고 있는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지구가 과연 새로운 천년에도 인류에게 안정된 삶의 공간을 허용할 수 있을지 마저 의심되는 조짐이 사방팔방에서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지구는 이미 인간이 온갖 지혜를 다 짜내도 60억 인구가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나가기에는 너무나 비좁고 모든 면에서 부족한 공간이다. 그 동안 인간이 지구 생태계에 저질러 온 온갖 형태의 이기적 만행이 이제는 인간의 생명줄을 조여오고 있는 상태이다. 지구 전체를 위협하고 있는 드러난 절박한 문제들만을 대충 열거해도 다음과 같다. 인구과잉, 오존층파괴, 지구온난화, 생물의 멸종,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 산성비, 핵물질에 의한 오염, 열대우림의 벌채, 습지파괴, 토양침식, 사막화, 홍수, 기아, 호수와 하천과 강의 범람, 지하수의 오염과 고갈, 연안과 강 하구의 오염, 산호초의 파괴, 기름유출, 어류의 남획, 쓰레기 매립지의 확대, 유독성 폐기물, 살충제와 제충제 남용에 의한 중독, 작업장에서의 유해물질 노출, 도시의 과밀화,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고갈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 시대의 절박한 문제들이 깊이 고찰해볼 때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세계인구를 적절한 선으로 유지하는 과제는 전세계적으로 빈곤이 줄어들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동물과 식물종의 대량 멸종사태는 지구의 빈민국들이 지고 있는 엄청난 외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는 빠른 속도의 인구증가와 결합되어 지역 공동체의 몰락과 민족과 종족간의 갈등과 폭력 사태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21세기 초 인류가 부대끼고 있는 이러한 제반 문제들은 인류가 처한 하나의 커다란 위기가 여러 다른 측면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게 총체적으로 문제에 접근할 때에만 인류가 놓인 위기에 걸맞는 대처방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2) 생태문제와 발상의 전환
21세기 인류가 부딪히고 있는 최대의 난제는 <생태문제>와 <인구문제>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성공을 자축하는 샴페인 소리가 요란한 현금 이 문제는 더욱 더 절박한 인류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이들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와 대안모색이 수행되어 왔다. 이 문제를 순전히 기술과 과학의 문제로 보고 그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일군의 사상가들과 과학자들도 있지만 많은 지성인들이 과학 내지는 기술의 문제를 과학 또는 기술로 풀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그 동안 새로운 접근방법, 새로운 해결방법은 발상의 전환, 의식의 전환, 생활방식의 전환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 중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사상의 하나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자연에 대한 지금까지의 정복자적인 지배의 태도를 바꾸어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살아나가며 함께 진화해나가야 한다는 소위 <공생과 공진화>의 사상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연에 대한 시각, 즉 자연을 보는 눈을 바꾸어야 한다. 자연을 더 이상 대상화시켜 인간이 마음대로 파헤쳐 이익을 극대화해도 되는 에너지 저장창고쯤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자연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의 자양분을 받고 있는 탯줄이며 생명의 텃밭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 천년을 맞이하여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보다도 <생태문제>이다. 인간이 또 다른 천년을 맞이할 수 있으려면 자연에 대한 관계맺음의 방식이 바뀌어야 하고 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사명에 대해서도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인식론적 사유틀이 <존재(있음)에서 생명(살아있음)>에로 전환되어야 한다. 동서양의 대화를 통해 <생명과 더불어 철학>하면서 인류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려고 시도해야 한다.
인류는 지금 전환기에 서 있다. 정보화 시대, 세계화 시대라는 말로 지칭되는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다. 세계가 하나가 된 지구촌 시대의 최대의 과제는 <더불어 삶>이다.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다른 생명체와도 서로 살리며 더불어 살아야 하고 생명이 없다고 간주되고 있는 무생물하고도 조화와 균형 속에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 이렇듯 지구 위의 모든 존재하는 것이 서로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야 하는 과제를 슬기롭게 떠맡아가야 할 21세기의 최대의 화두가 <생명>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세기말부터 철학에서의 핵심적인 논의도 <생태문제> 내지는 <생명문제>를 맴돌고 있다. 21세기 제일철학은 당연히 <생태철학> 또는 <생명학>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이다. 20세기말부터 생태 내지는 생명에 대한 글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인식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등장하는 <생명문제>는 그 동안 소외되어 왔던 동아시아의 전통에 대한 관심도 불러 일으켰다. 생명을 존중해온 동아시아적인 생활방식 또는 삶의 문법이 위기에 놓인 지구와 인류를 구원해줄 대안적 사상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그렇다. 더욱이 이제 지구 위에서의 인류의 삶은 세계화 또는 지구화로 인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유대와 연대 속에서 공동의 문제해결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다. <생명>에 대한 논의에 한국의 사상가들이 세계적인 사상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자신들의 주장을 펼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의 전통적인 사상 배경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의 전통적인 <살림살이>의 생활방식과 사유자세를 현대의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내는 대안적 사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서양 사상가들로부터 생명사상을 배워야 할 처지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땅에 사는 철학인들이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생태학, 새로운 인간학으로 <생명학>을 개발해서 세계철학에 기여할 수 있는 과제와 책무가 생겨나는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동서철학의 화합, 종합, 융합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현 시점에 한국의 철학인들이 떠맡아야 하는 세계철학사적인 임무는 자명하다. 우리가 간직해온 동양사상의 바탕 위에서 현대의 서양사상을 비판적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바로 그것이다.

2. 경쟁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

서양사람들의 논리는 한마디로 죽임의 논리다. 그들은 허울좋게 “소비는 미덕이다”라고 외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인류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비가 미덕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부추겨야 한다. 없는 욕망도 만들어내 필요 없는 물건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구입하도록 보이지 않게 조장해야 한다. 이것이 서양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간단한 생산과 소비구조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우리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남을 밟고 올라가려 한다. 여기에는 살림의 논리, 상생(相生)의 논리가 들어설 틈이 없다.
서양사람들은 이런 무한경쟁의 논리를 다윈의 진화론에서부터 배웠다. 다윈의 진화론은, 서양인들이 자연의 생태계에서 보고 배운 삶의 논리다. 그들은 자연의 생물들이 살아가는 실상을 그렇게 보았으며 그래서 거기에서부터 진화의 원리를 끄집어내 자연도태,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원칙을 이론으로 정립해낸다. 이들은 그들이 발견한 이 논리를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최고만이 살아남는다는 <경쟁의 논리>로 만든다. 그러기에 최고가 아닌 사람은 희생된다. 아니 마땅히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런 논리는 차가운 계산의 논리, 이성의 논리며 매우 합리적이다. 이런 논리대로 라면 80%의 사람들은 못살게 되어있다. 나만 이 80%안에 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리스본 그룹은 자신들의 연구결과 보고서인 『경쟁의 한계』에서 경쟁의 논리가 몰고온 폐해를 이렇게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경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시대는 사사로운 감정이나 휴전이 용인될 수 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다. 거기에서는 ‘타인=경쟁자’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인간의 삶이나 조직의 활동 자체가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 게임’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금 지구촌은 무한경쟁을 외치는 새로운 경쟁시대에 들어서 있다. 이러한 무한경쟁 시대에는 ‘생존 우선’이라는 현실논리가 지구촌 ‘공동번영’이라는 이상적 목표보다 훨씬 더 절실한 과제로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이 같은 무한경쟁이 인류 전체의 생존마저 위협할 수 있을 만큼 심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늘날 지구촌 국가들은 대부분 자유시장경제를 지도이념으로 채택하고 있다. 또 국경을 초월한 ‘세계적’ 자본주의가 ‘민족적’ 자본주의를 빠른 속도로 대체해 나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국제협력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개인은 물론 국제기구 같은 집단안보체제도 끊임없이 위협에 노출되고 있다. 그 이유는 남북분열이 선진국과 극빈국의 경제격차를 더욱 고착시켰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 중 부유층에 속하는 상위 20%와 빈곤층에 속하는 하위 20%의 격차는 지난 30년 동안 계속 확산돼 가고 있는 추세다. 완전고용 정책이 더 이상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도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사회보장제도의 범위가 대폭 축소되면서 개인은 이제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혼자 투쟁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세계화 시대에 더 이상 근대화 시대에서 통용되었던 삶의 원칙은 적용될 수 없다. 울리히 벡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 시대는 제1 근대와는 다른 제2 근대라고 규정하며 제2 근대에 맞갖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제2의 근대의 관건을 이루는 질문에 대한 답안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탄한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21세기에 평화가 있을 것이다. 프리쵸프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할 수 있다며 “발상의 전환,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실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 사람을 보는 눈을 바꿔야 한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머리를 굴려 계산해서 이득이 되는 것만을 하려는 약삭빠른 생활방식을 버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영성으로 아우르고 감싸 보살피는 사유태도를 배워 익혀야 한다.
20세기 위대한 영성가인 마더 데레사는 “나눔 없이 평화 없다”고 하였다. 지금 지구상에 평화가 없는 것은 나누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잘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려는 나눔의 정신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같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인구폭발의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60억의 인구가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해법은 결코 경쟁의 논리, 죽임의 논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위대한 영성가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21세기를 예비하면서 자신의 삶을 영성적으로 산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아시아는 그 어느 대륙보다 영성적인 분위기가 삶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기에 21세기 위대한 영성가는 아시아권에서 나올 것이라 한다.
우리는 아래에서 발상의 전환을 위한 실마리를 한국 민중들의 전통적 살림살이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인간관과 그 생활방식에서 찾아보도록 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서양의 근대화에 대한 우리 전통의 대응책으로서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를 내세운 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 아래에서 모든 속박과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며 투쟁하여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근대인은 지구촌 시대를 맞아 이제 시야를 더욱 확대시켜야 한다. 개인인 자신의 안녕이나 동족인 자기 민족의 평안만을 추구하던 개인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세계관과 인간관에서 벗어나 지구 위의 모든 인류, 더 나아가 앞으로 태어날 미래의 인류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지는 성숙한 세계시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더 나아가 지구 자체의 유지와 보존에 대해서도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우주 진화의 꽃으로 자처한다면 우주 진화의 방향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우주인으로서 지구 살림살이에도 깊이 관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인간이라는 종의 평안만을 염려해서는 안 되고 지구 위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에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

3. 인간중심에서 <생명>중심에로!

지금으로부터 백 오십 년 전의 조선 사회를 지탱하던 근본가치관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유교적 근본가치에 바탕한 충(忠)과 효(孝)가 중심에 있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이었다. 그로부터 백 오십 년이 지난 지금 한국사회를 받치고 있는 근본가치는 더 이상 충과 효같은 유교적 덕목이 아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우리 사회에서도 서구사회를 지배하는 자유, 평등, 인권, 사회정의라는 기본가치가 아무 의심 없이 통용되고 있다. 달라진 가치관에 따라 한국 사회는 몰라보게 변했고 많은 면에서 긍정적으로 발전되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 이러한 서구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끌고 가는 방향이 어디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20세기 초반 많은 서구의 학자들이 서양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퍼트리는 삶의 방식과 사유태도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엄청난 문화발전의 최종 단계에 기계화된 화석 인간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는 그러한 ‘최후의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이 사실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육욕주의자. 이러한 쓰레기 같은 인간이 지금까지 인류가 도달한 적이 없는 그러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부할 것이다.” 베버가 말한 ‘가슴이 없는 육욕주의자들’이란 표현은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상황을 적절하게 예견한 표현이다. 그가 가슴이 없다고 한 것은 물질이 주는 감각적 쾌락만을 알고 그것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며, 인간만의 독특한 정신적 영역, 예술적 영역 및 종교적 영역과 관련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그런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인간은 육욕적 쾌락에만 관심을 두고 거기에 탐닉하는 쾌락주의자들이다. 이와 같은 쾌락주의자들은 쾌락을 주는 물질만을 소유하고 소비할 뿐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식하고 무감각한 야만인이며 미개인이다.
싱싱하고 팽팽한 육체, 맛있는 음식, 육체적인 쾌락사냥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바로 베버가 앞서 내다본 ‘최후의 인간’이며 ‘기계화된 화석 인간’이다. 자유, 평등, 인권, 사회정의라는 서구의 가치관의 밑바탕을 잘 분석해보면 거기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소위 선진국 사회에는 물질적인 풍요에 따른 물질지상주의적, 황금만능주의적 생활 태도가 두루 퍼져 있으며, 이지러진 자유의 행사에 따른 이기주의적 태도와 소유욕이 당연시되고 있다. 더 나아가 잘못된 평등관에 따른 인간의 기능화, 부품화가 전개되고 있으며, 지나친 종교의 세속화와 가치의 상대화에 따른 허무주의적 경향이 만연하고 있다. 왜곡된 인권 해석에 따른 인간의 동물화가 촉진되어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쾌락사냥에 몰두해서 성문란은 자명한 귀결이고 알콜과 마약중독에 의한 사회적 혼란이 한층 더 깊어가고 있다.
이러한 서양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밑바탕에는 무엇보다도 특히 인간중심적인 시각이 깔려 있다. 거기에서는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원칙을 앞세우는 진화론적 세계관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이들 진화론자들은 우주론적 진화의 꼭대기에 진화의 꽃으로 인간이 놓여 있다고 본다. 그들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우주의 법칙인 진화법칙에 의해 우주의 주인이며 정복자가 된 인간이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의해 다스릴 수 있고 다스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 사회에도 똑같이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법칙이 적용되는 것으로 여긴다. 무한경쟁을 앞세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당연한 자연의 법칙인 것으로 선포하고 있다. 이렇게 무한욕망, 무한소유, 무한소비를 부추키며 무한경쟁을 유일한 생존의 법칙으로 내세우고 있는 서양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밑바탕에는 인간중심적 시각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때의 인간이란 물론 서양인인 백인이다. 이 세계관을 주도하는 원리는 자유경쟁이라는 이름아래에서 자행되는 자본과 권력에 의한 정복이며 지배이다.
20세기말부터 이러한 인간중심적, 서양중심적 시각이 사방팔방서 비판받고 있다. 서양의 역사를 두루 질러 통용되어 왔던 다양한 시각들이 총체적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졌다. 변하지 않는 원리(아르케)나 원인이나 바탈을 찾아 나섰던, 고중세의 실체론적 세계관이 환원주의적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정밀한 기계를 모델로 삼아 모든 것을 기계 역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기계론적 세계관도 전체를 보지 못하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고찰방식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생물의 세계에서 관찰해서 얻은 시각인 적자생존과 자연도태의 원리를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시키려든 진화론적 세계관도 근본을 보지 못하고 결과 ― 꽃 ― 만을 본 잘못된 관점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최근에 들어서 서양의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요소환원주의와 단일결정론으로는 복잡한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져 가고 있다. 변하지 않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구성요소를 찾아서 그것으로 전체를 설명하려는 태도가 먼지를 갖고 우주를 설명하려 드는 어처구니없는 시도라고 비판받고 있다. 학자들은 전체를 고려에 넣어야 하며 그 전체가 보이지 않게 모든 부분들을 얼기설기 엮고 있어서 부분들이 드러나게 드러나지 않게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전일론적 시각과 관계론적 관점이 새로운 방법론적 접근방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일론적이고 관계론적인 시각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바로 그러한 세계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생명이 화두가 되고 생명체인 유기체가 새로운 설명의 모델이 되어 세계를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으로 부각되고 있는 현금 이러한 새로운 생명론적 패러다임의 모색에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이 일조할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중심에서 생명중심으로 발상의 전환을 감행해야 한다. 어느 인디언 추장의 말이 우리에게 깊은 경종으로 와 닿는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한 가족이 혈연으로 이어지듯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지구의 딸과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닥친다. 인간들이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단지 그 그물 속의 한 올일 뿐. 그 그물에 가하는 모든 일은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다.“(테드 페리)

4. 새로운 삶의 모형은 “살림살이”의 길 ― 지구 살림살이

우리는 생명의 세계에서 “살림”의 원칙을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한다. 우주적 살림살이의 대 원칙은 “나눔”과 “비움”이다. 우리 한국인의 생활세계에 각인되어 있는 삶의 문법을 고찰해 볼 때, 우리는 거기서 “살림, 섬김, 비움, 나눔”이라는 살림살이의 원칙을 찾아낼 수 있다.
예전에 서양은 자기들의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이고 나머지는 모두 변방이라고 보았으며 하나의 진리, 하나의 문화, 하나의 언어, 하나의 이성만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이제 세계는 다원화가 되어가고 있고 문화와 가치가 세계에 따라서 다름을 보고 알게 되었다.
서양의 이성은 기계론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 기술적이고 계산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서양인의 생활세계적 이성을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이성”이라고 이름한다. 그 이성을 서양인들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세계에 따라서 이성의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 세계적 이성”이라는 개념 속에 담긴 본래의 뜻이다.
철학은 삶의 세계에서 어떤 생활 방식을 표본으로 삼아 그것을 이론화시키고 합리화시킨다. 그것이 그들 세계의 독특한 이성이며 세계를 보는 눈을 이룬다. 하이데거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이것이 “존재의 이해” 이고,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다.
이러한 존재이해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에서 자유, 평등, 인권, 사회정의를 기치로 내건 유럽적인 세계관이 승리하였고 그래서 기계론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 기술적이고 계산 가능한 이성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원화된 현대에서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자신의 이성만을 고집하여서는 화해와 평화를 기대할 수 없고 오직 갈등과 투쟁만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간직되어온 다른 이성의 형태를 알아보고 인정할 수 있는 ‘가로지르기 이성’이다.
다른 세계관과의 대화, 다른 문화간의 대화,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는 가로지르기 이성이 필요하다. 내 것만을 옳다고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대화를 나누어 더 보편적인 것을 찾아나서는 열린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가로지르기 이성을 전제로 하면서 우리의 생활세계를 되돌아볼 때, 우리 나름의 독특한 이성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활세계를 각인한 우리 나름의 생활세계적 이성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살림살이의 이성”이라 이름할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천(天)․지(地)․인(人) 합일(合一)의 삶을 살았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존재하는 “사이존재”이다. 예전에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하늘과 땅 사이에 책임을 져야 할 인간이 잘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보았다. 물이 넘쳐 홍수가 났을 때 그 물이 왜 넘쳤는지 원인을 알 수 없으면, 그 고을의 책임자가 천주(天柱)라고 하는 동헌의 기둥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찧어 인간의 잘못에 대하여 대신 사죄하였다.
우리는 자연을 서양인들처럼 에너지 창고로 본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인간이 배워야 할 도리를 보았고 따라야 할 덕목을 읽어내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인품(人品)이 있듯이 꽃에게도 화품(花品)이 있다고 보았다. 대나무는 절개, 모란과 작약은 부귀, 개나리와 진달래는 그 분명한 거취가 그 꽃들의 화품(花品)이다. 이러한 도덕의 범위를 짐승에까지 확대하여 벌과 개미에게는 군신의 의(義)가 있고, 원앙에게는 부부의 정(情)이 있고, 기러기에게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예(禮)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우리는 생명체가 아닌 무생물도 그냥 마구 다뤄도 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을 특별하게 생각하여 다루었다.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디기 어려운 며누리는 팔(八)자를 적은 바가지를 갖고 냇가에 가서 실컷 울고 그 바가지를 쪼개서 냇물에 떠내려보내어 자신의 한을 풀었다고 한다. 물은 우리에게 생명의 상징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비가 온 뒤에 산에 갈 때에는 코가 얼기설기한 짚신을 신고 갔다. 비가 온 뒤에는 길가에 벌레가 많이 나오는데, 그 벌레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그러한 신발을 신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에 갈 때에는 요강 같은 것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우리는 “산에 간다”라는 말 대신에 “산에 든다”라는 말을 썼다. 산에 허락 맡고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 마음대로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 소유, 욕망, 경쟁이라는 서구적인 삶의 문법이 우리의 삶에 파고들어 죽임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 죽임의 문화가 우리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몰살시키고 우리들의 생명까지도 멸절시키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법 속에 새겨져 있던 살림살이의 원칙을 배워서 오늘날에 되살려 놓아야 한다. 새롭게 다시 살림과 섬김, 비움과 나눔의 가치관을 정립하여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살림살이의 문법이 지구의 살림살이 문법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이것을 이론화시키고 체계화 시켜야 한다.

5. 한국인의 삶 속에서 찾은 살림살이의 길

1) 살림살이
우리는 예로부터 인간을 하늘과 땅 사이[天地間], 때 사이[時間], 빔 사이[空間], 사람 사이[人間]에서 사이를 나누며 유지하고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이-존재>로 보아 왔다. 이러한 한국인의 생활세계를 보이게 보이지 않게 규정해온 한국인의 삶의 심층문법은 한마디로 <살림살이>이다. 지금 전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통합시키면서 무섭게 자신의 지배영역을 지구상의 곳곳으로 뻗치고 있는 원리는 국제자본금융의 경제논리이다. 모든 것을 돈이라는 경제단위로 단일화시킬 수 있는 이 무서운 수량화의 논리 밑바탕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표상화하고 나아가 수량화하려 한 서구의 형이상학이 깔려 있으며, 우리는 그 이념이 생활세계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고 있는 셈이다. 경제중심의 생각이 지금 인류를 무한한 욕망에로 부추키며 하나뿐인 지구를 파멸의 낭떠러지로 몰아가고 있음을 이제 서구의 지성인들도 깨닫고 어떻게 하면 경제학과 환경[생태]학을 조화시킬까 고심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경제학(Ökonomie, economy)과 환경[생태]학(Ökologie, ecology)의 어원을 보면 그것은 똑같이 그리스어 <οικος(집, 주거, 거주)>에서 유래한다. 하나는 가정경제[가계운영]에 뿌리를 두고 있고 다른 하나는 주거관리에서 연원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가정경제와 주거관리가 없었을 리 없기에 거기에 해당되는 우리말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둘 다 <살림살이>이다. 우리말의 <살림살이>에는 살리는, 다시 말해 죽지 않도록 감싸주고 보살피는 삶의 방식을 가장 중요한 생활자세로 본 우리 선인들의 삶의 철학이 배여 있다. 살림을 생활화해서 그것을 우리의 삶의 일로 삼아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살림살이>라는 낱말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수량화하여 죽여버리는 <경제학>이 아니라 모든 것을 살도록 감싸주고 보살펴주는 <살림살이>에서는 생태계 파괴의 꼬투리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개별 생명체의 멸종과 지구 절멸의 위기에 봉착한 현대인이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마당에서 살림을 생활해온 이 땅의 선조들의 삶의 철학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살리다>는 사역동사로서 ‘살게 하다’, 달리 말해 ‘죽지 않도록 하다’를 뜻한다. ‘살다’와 ‘살리다’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살다’는 자동사로서 ‘목숨을 지니고 있다’,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있다’를 뜻한다. 이와는 다르게 ‘살리다’는 그냥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부각시킨다. 살아있음의 상태를 바람직한 가치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여 살아있는 것이 그 살아있음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보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다른 살아있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것의 <살아있음>에 관여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렇듯 살아있음을 가치로서 소중히 대하는 생활방식은, 그것을 <생명(生命)>이라고 명명하며 거기에서 살아있도록 보살펴야 하는 명령을 보고 아무리 미물이라고 살아 있는 것은 천명을 받고 거기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하였다. 우리말 ‘생명’은 서양어인 ‘vita, life, vie, Leben’ 등에서 표현되고 있는 단순한 ‘삶’이 아니다. 생명이란 낱말은 생물, 유기체, 목숨 등과 같은 비슷한 단어들로는 감지될 수 없는 성스러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살아있음에서 그 살아있음을 유지하고 보존해야 함을 말없이 전달하고 있는 하늘의 뜻을 알아보아야 함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살림>이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지 않고 살아 있도록 보살피고 보호해야 하는 인간의 생명론적 역할을 함축하고 있다.
살아있음에 동참하고 살아있음의 질서를 알아야, 다시 말해 나서 살다가 죽어 사라져버리는 우주적 생명의 대원칙을 알아볼 수 있어야 <살림살이>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살다’라는 현상을 우리 한국인들은 어디에서 보고 있으며 그 실마리는 어디에서부터 얻고 있으며 그것을 어디까지 적용하여 사용하였는가?

2) 삶을 앎: 사람
우리말의 ‘살다’는 목숨을 지니고 있는 생물이 목숨을 유지하려고 움직이는 모든 동작을 다 지칭하는 낱말이면서 그 어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생명의 에너지를 불살라 가는 전 과정을 뜻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부여받은 생명의 에너지를 불사르다가 마치 촛불이 꺼져버리듯이 그렇게 사라져버린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어떤 형태로든 열과 힘을 지니고 있으며 그 열과 힘을 지니고 있는 한 그 형태로 있다가 자신의 열과 힘을 다 써버리고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안다. 우주의 별들도 다 자신의 열과 힘을 태우면서 우주에 반짝이며 존재하다가 열과 힘이 소진되면 산산이 부서져 우주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별들의 탄생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살다’라는 낱말 속에 간직되어 있는 우리 민족의 상상력과 기억을 파헤쳐 본다면 그 밑바탕에는 연소작용, 즉 불을 사르는 현상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불이 타오르는 화산을 살아 있는 화산[활화산(活火山)]이라고 하는 데에서도 보듯이 불사름의 현상에서 유추하여 살아있는 생명현상도 그렇게 설명하여 본 것이다. ‘살다’라는 말은 원초적으로 보아 불이 타고 에너지가 정지상태에서 운동상태로 옮아간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너지는 태양에서 비롯되기에 태양은 예로부터 불의 상징이었고 삶의 바탕인 대지를 생성시키는 ‘화생토(火生土)’의 본거지이며 모든 생명체를 유지시키는 에너지 공급원이다.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정지상태에서 운동상태로 가는 것이 넓은 의미의 ‘사르다’, ‘살다’를 뜻한다면 땅 위, 하늘 아래에 있는 변화하여 움직이는 모든 것은 사름(삶)을 명 받은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땅 위 하늘 아래에, 다시 말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생명체 중에서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름을 알기에 그것을 살려 사름이 계속 진행되도록 돕는 전형적인 ‘사름’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인간은 그러한 사름을 사는 ‘사람’일 뿐 아니라 그러한 삶을 알기에 앎을 살면서 살림살이를 사는 ‘삶앎(>사람)’인 것이다.

3) 생명의 원칙: 비움과 나눔 그리고 섬김
이렇듯 우리 한국인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고정된 <있음>을 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되어 가는 <살아있음>을 보았다. 살아있음은 정지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며 <되어 가는> 것이다. 모름지기 생명체는 그러한 생명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어 잘 되어 가야 하며, 살림을 생활화해야 하는 사람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생명의 원칙을 잘 따르는 사람을 <된 사람>이라 부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못된 사람>이라고 부른다. 우주적 생명사건에 동참하며 잘 되어 가는 생명체는 자신을 고집하지도 공간에 집착하지도 시간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늘과 땅 사이에 자신을 내맡기며 되어 감[변화]의 원칙을 따른다. 이 <되어 감>의 원칙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비움>이며 없어짐이며 사라짐이다. 되어 감에서 우주 현상의 본질적인 차원을 감지했을 때 거기에서 부각될 수 있는 근본개념은 <있음[존재]>이 아니라 <없음[無, 空]>이다. 있음이란 없음과 없음을 잇고 있는 순간적인 연결고리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에서 생겨나 주어진 삶의 에너지를 불사르며 존재 속에서 되어 가다가 에너지를 다 소진한 뒤에는 다시 무 속으로 사라져 간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있음>이 놀라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이러한 <없음>이 경탄과 사색의 대상이었다. 무수한 별무리들을 다 감싸 안고 있는 저 무한한 천공이, 한없이 너르며 시간 속에서도 한결같이 늘 그러한 하늘[한늘 = 끝없이 크고 늘 그러한]이 놀라움과 경배의 대상이었다. 온갖 것을 다 살게 하고 있는 저 광활한 빈탕한데[虛空]는 분명 없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이러한 <없이 있는 것>에 매료되었다. 우주적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분명 이러한 없이 있는 어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을 <하늘님[하느님]>이라고 숭배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없이 계심>에서 살림살이의 원칙을 유추해낼 수 있다. 우주적 생명의 본질은 <있음>에 있지 않고 <비움>에, 즉 <없이 있음>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이렇게 없이 있으며 모든 변화하는 것을 움직이며 되어 가도록 하는 것을 우리는 <거룩한 신>, <거룩한 영>으로 보았다. 우주의 모든 곳을 두루 꿰고 있으며 우주적 생명을 유지 보존하고 있는, 없이 있는 신령한 존재를 우리는 <한얼>이라 명명하였다. 우리는 변화하는 모든 것에서, 특히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서 하늘의 명인 얼을 알아보고 그것들이 그것들로서 따로 서서 사이를 나누면서 그것들의 되어 감이 잘 전개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것으로서 서도록 도우면서 우리는 없이 계신 한얼을 섬기는 것이다. <섬김>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서 그 자신으로 서서 우주적 생명의 전개과정에 편입되도록 관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한얼>을 알아보고 모시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큰 눈으로 멀리 볼 때 자신을 살라 버리고 없애 버려 우주적 생명의 얼에 동참하는 것임을, 그렇게 자신을 가르고 나누어 우주적 생명을 살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누다>는 나서 갈라져 나가고 또 나서 갈라져 나가는 식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가르고 나누어 생명의 전개과정에 동참하는, ‘사이를 나누는’ 살림살이의 대원칙이다. 새롭게 나서 그 자신으로 서서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생명을 나눠 갖는 것이 곧 <나눔>이다. 갈라지지 않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생명의 질서, 생명의 흐름, 숨돌이와 피돌이를 막는 자이다. 자신을 나누어 갖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를 비우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의 반역자들이다. 이렇게 <비움>과 <나눔>은 우주적 살림살이의 대원칙이다.
우리말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세계관에서부터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살림살이를 유추해낼 수 있다. 한국인의 삶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모든 것과 생명의 교감을 나누며 살아온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삶이었다. 천지인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생명체를 이루고 그 안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살아있는 우주 또는 자연의 일부로 보고 사는 생명중심주의의 삶이었다. 우주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자연을 인간이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삶의 도리를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장으로 여긴 자연동화주의의 삶이었다. 이러한 자연관과 생명관을 가진 한국인에게 생명체는 단순히 감각을 가진 동물만이 아니고 자신의 복제능력을 가진 유기체만도 아니고 진동, 순환, 팽창 속에서 나름대로 우주적 생명의 생성과 전개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인간은 우주 진화의 꽃으로서 자신 안에 이러한 모든 우주 생성과 진화의 열매를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알아내고 그 우주 진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 한다.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과 동시에 또한 책임의 막중함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 생명의 생성에 동참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살아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과제이며 그러한 인간의 생활양식을 우리는 <살림살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살림의 생활이며 살림을 생활화하는 <살이>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문법이었던 <살림살이>는 분명 숨돌이와 피돌이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하나뿐인 지구를 살리고 그 안의 모든 생명체를 살릴 수 있는, 새 천년을 위한 새로운 대안적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살리며 보존해야 하는 지구 살림지기로서 생명의 그물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럴 때 생명의 그물은 인간을 자기 그물의 한 그물코로 받아들이며 생명의 그물망을 함께 짜나갈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삶의 길라잡이였던 불전은 우리가 취해야 할 살림살이의 태도를 이렇게 설하고 있다.
“꽃의 아름다움과 색깔, 그리고 향기를 전혀 해치지 않은 채 그 꽃가루만을 따가는 저 벌처럼 그렇게 잠깬 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법구경』제4장 49절) “모든 흙과 물은 다 나의 옛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다. 그러므로 항상 방생을 하고 세세생생 생명을 받아 항상 머무르는 법으로 다른 사람도 방생하게 해야 한다. 만일 세상 사람이 축생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마땅히 방편을 써서 구호해 괴로움을 풀어주어야 한다.”(『大正藏』제24책)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존재를 ‘돌보고 보살펴야’ 할 ‘사이-존재’이다.

6. 21세기의 영성적 인간

우주진화의 꽃인 인간 안에는 지난 150억 년의 우주적 영성이 무의식적인 앎의 형태로 녹아 있다. 우주적 진화 속에서의 인류의 발달도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학자들은 인류 진화의 역사가 그 흔적을 개개인의 몸 속에 남기며 그것이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어두운 영역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의 종족발생적 차원의 경험들이 개개인에게 각인되어 개체의 삶의 과정 속에 개체발생적으로 반복되며 서서히 새로운 경험의 요소와 차원을 넓혀가고 종족발생적으로 이러한 새것들을 유전자 속에 각인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종족발생적인 차원에서의 인류의 현 시대적인 시점은 개인의 발달사에서 어느 시점을 나타내고 있을까 한 번 생각해봄 직하다. 주체의 시대인 근대가 그 극에 이르고 이제 주체의 죽음과 해체를 주장하는 탈근대적인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는 현대를 되돌아볼 때 자기의 뜻과 주장이 확고하여 마음먹은 바를 꼭 관철하고야 마는 고집스러운 불혹의 나이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인들의 인생관에서 50대는 무엇을 뜻하는가? 세속적으로 이룰 것은 다 이루어 놓고 시간이 남아돌아 시간을 죽이고 있는 나이는 아닐까? 그 남아도는 시간을 육체적인 쾌락의 탐닉에, 스포츠에, 소비에, 무언가 새롭고 흥미로운 것 찾기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가(자유)시간을 여행에, 다양한 취미생활에, 다양한 문화생활에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불가능에 도전하며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실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음악과 미술과 같은 창의적인 예술활동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새로운 형태의 초월을 체험하고 신적 존재를 만나기 위해 세속을 떠나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이 모든 것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허탈감 속에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현재적인 경험이 장래의 어느 시점에 종족발생적으로 인류의 무의식을 각인하여 인류의 미래의 모습을 규정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현재적인 삶에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탐욕, 다툼, 경쟁, 지배, 소유, 소비, 소모, 방탕, 후안무치 속에 50대에서 삶을 끝낼 것이라면 지금 이대로 기계화된 마음에 우리 자신을 맡겨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면 인류도 아마 21세기를 온전하게 넘기지는 못할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천년은 아마도 인간 없이 계속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인간이 우주진화의 꽃이자 구슬로서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서양의 많은 지성인들이 그토록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을 갈구하며 고대했는가 보다.
21세기는 새로운 영성, 정신성, 종교성의 시대가 될 것이며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성인들이 많다. 자세히 고찰해 볼 때, 그것은 우리의 개인 발달적인 삶의 전개하고도 통하는 점이 있다. 우리는 50대를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제 자신의 자아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주체성만을 고집하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하늘의 뜻을, 우주의 숨은 명을 알아야 하는 나이가 아닌가? 육체에 묻히거나 가족이나 민족의 울타리에 갇히거나, 돈이나 이념에 눈이 멀어버리지 않고, 나 중심, 민족 중심, 종파 중심, 인간 중심에 빠지지 않고, 욕망을 비우고 맘을 자유롭게 놓아 우주의 얼과 하나되는 그런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는 나이가 아닌가? 그럴 때 인류가 고대하는 새로운 영성의 시대를 열 수 있지 않는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 할 가치들은 바로 이러한 영성의 시대를 예비하는 가치들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나이 50은 이렇게 영적인 나인 <얼나>로 깨어나 내 안에 있는 속알[性, 天命]을 깨우쳐 알아 그 바탈을 태우게 되는 나이이다. 나 하나도 주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정력제를 찾아다니는 나이이어서도, 가족과 가문에 매여 문벌․학벌․재벌의 울타리에 갇혀 명예와 권위에 안주하며 만족해하는 나이이어서도, 민족과 국가, 문화와 이념의 일면성에 눈이 멀어 자기 중심적이고 민족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정당화 속에서 언어의 놀이에 도취되는 나이이어서도 안 된다. 침묵 속에서 내 안에서 말걸어오는 <없이 계신 하느님>의 부름에 응해 우주적 대해탈의 역사에 동참하려는 원대한 꿈을 키워야 할 나이이다. 인류의 나이는 기술문명의 편함에 모든 것이 퇴화되어 버린 그런 무기력한 나이에 고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류는 영적인 <얼나>의 단계로 솟나야 한다. 그럴 경우 우주의 진화는 그 방향을 달리 하게 될 것이며, 이 우주는 인간을 털어내서 인간 없이 그 생성과정을 계속하려 하지 않고 인간과 더불어 또 다른 새로운 천년들을 맞이하려 할 것이다.
지천명의 나이임을 느끼면서 김지하는 다음과 같이 <나이>를 반추한다.

“나이 먹는 것
차츰 쓸쓸해지는 것
혼자서 우주만큼 커져
삼라만상과 노닐도록
이승에선 그렇게 외로워지는 것.“

  이름   메일   회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번호제 목첨부작성일조회
76   생명운동, 동학에서 배운다   2006/09/06(수)  11138
75   고대 생명사상의 원류와 생성   2006/09/06(수)  10581
74   생명학의 미래를 생각한다   2006/09/06(수)  5608
73   생명이란 무엇인가?   2005/12/21(수)  8806
72   생명   2005/10/04(화)  17158
71   역사 속의 생명윤리   2005/10/04(화)  10222
70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위한 윤리   2005/10/04(화)  13997
69   생명과학의 문제와 철학적 성찰   2005/10/04(화)  12414
68   생명건축: 동양사상을 통해본 전통건축   2005/10/04(화)  6400
67   가톨릭 신학적 관점에서 본 생명   2005/10/04(화)  23307

 
처음 이전 다음       목록 쓰기

  

 


한국생명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