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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9/6(수)
생명운동, 동학에서 배운다  
박맹수(원광대 교수)


1. 동학사상에서 배워야 할 생명평화운동의 철학

<지금 다시 왜 동학인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반세계화, 정규직과 비정규직, 절대 빈곤층과 차상위 계층, 진보와 보수, FTA(자유무역협정), 저출산 고령화사회, 양극화 현상, 디지털 혁명, 유비쿼터스, 문화 컨텐츠, 한류, 생명과학, 줄기세포, 뉴라이트 운동, 탈근대주의, 다원주의, 생태주의, NGO(시민운동단체), 공동체, 양성평등, 생명 평화, 유기농, 한살림, 지속가능한 사회 등등 과거에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이 널리 유행하고 있다. 핵 폐기장 문제를 비롯하여, 새만금 문제, 천성산 문제, 최근에는 평택 대추리 사태 등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절실한 문제들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위에서 예를 든 용어나 문제들에 대해 일일이 그 의미를 이해하고 분석하기보다는 한 마디로 세상이 크게 달라졌으며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운 최제우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오늘의 세상은 ‘다시 개벽’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변화들이 과연 진정한 ‘다시 개벽’의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든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변화상들은 각각 문화와 문명의 진보들을 담보하고 있을지 몰라도 총체적인 차원에서는 전 지구적 위기의 시대, 생명의 총체적 위기 시대의 한 구성 요소들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전 지구적 종말’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와 있는 시대가 바로 오늘의 시대가 아닐까 한다. 바로 여기에 지금이야말로 수운 선생이 말씀하신 진정한 ‘다시 개벽’을 위한 공부와 실천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다시 개벽’을 꿈꾸며 등장했던 동학에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동학의 참뜻>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학사상과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을 ‘민족사’라는 한정된 울타리 안에서 일어난 사상 혹은 사건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큰 문제다. 동학은 결코 ‘민족사’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힐 사상이 아니다. 1894년의 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최소한 ‘동아시아’ 차원에서, 나아가서는 세계사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연구되고 분석될 수 있어야 한다.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은 그럴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가진 사상이자 사건이다. 또 하나, 지금까지는 동학사상에 대해 혁명사상이다, 아니다라는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동학사상 속에 혁명성이 있느냐, 아니냐 하는 논쟁도 의미는 있지만, 그보다도 더 본원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생명사상 또는 개벽사상의 관점에서 동학을 바라보아야만 진면목이 드러날 수 있다. 생명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전일성(全一性)이다. 동학의 핵심사상인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바로 생명의 특성인 전일성의 극치를 보여 주는 위대한 사상이다. 시천주에서 드러나는 전일성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 지구적 위기, 이른바 생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동학사상의 전일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연구와 실천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천주에 대한 깊은 이해, 이지적 차원의 이해만이 아닌 수행과 수련을 겸한 통전적(通全的) 이해가 반드시 뒤따라야 하겠다
그러면 1860년에 등장했던 동학이 당시 민중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었는지 예를 들어본다.

물음: 그러니 말씀이지, 그 때에 대신사(大神師, 수운 최제우에 대한 천도교 내의 존칭; 인용자 주)를 찾아오는 사람이 과연 많기는 많았습니까?
 
대답: 많고말고. 많아도 여간 많았나. 마룡동(馬龍洞, 수운 최제우가 살던 동네 이름; 인용자 주) 일판이 대신사(大神師, 수운 최제우 선생; 인용자 주) 찾아오는 사람들로 가득 찼었다. 아침에도 찾아오고 낮에도 오고 밤에도 오고. 그래서 왔다 가는 사람, 하룻밤 자는 사람, 여러 날 체류하는 사람. 그의 부인하고 나하고는 그 손님 밥쌀 일기에 손목이 떨어져 왔었다. 낮에 생각할 때에는 저 사람들이 밤에는 어디서 다 잘고 했으나 밤이 되면 어떻게든지 다들 끼어 잤었다. 그때 용담정 집은 기와집에 안방이 네 칸, 부엌이 한 칸, 사랑이 두 칸 반, 마루가 한 칸, 고간(庫間)이 한 칸이었는데, 안방 한 칸을 내놓고는 모두 다 손님의 방이 되고 말았었다.
그리고 이것을 보시오. 그때 찾아오는 제자들이 건시(乾柿, 곶감; 인용자 주)와 꿀 같은 것을 가지고 오는데 그 건시가 어찌나 들여 쌓였던지 그 건시를 노나(나누어; 인용자 주) 먹고 내버린 싸리 가지가 산 같이 쌓여서 그 밑에서 나무하러 오던 일꾼들이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그 싸리 가지를 한 짐씩 가지고 가곤 했었다. (소춘 김기전,「대신사 수양녀인 팔십 노인과의 문답」,『신인간』16, 1927년 9월호, 16-17쪽)

위에 인용한 내용은 수운 선생이 득도한 직후에 ‘노비해방’을 해서 수양딸로 삼았던 주씨라는 노인이 1927년에 증언한 내용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곶감을 들고 찾아왔기에 지나가던 나무꾼들이 곶감 먹고 나서 버린 싸리가지로 한 짐씩 나무를 해서 지고 갔을까? 다음의 기록을 보면, 주씨 할머니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고도 남는다.  

문경 새재(鳥嶺)로부터 경주까지는 4백리 남짓 되고 고을은 10여 개 정도 되는데 날마다 동학에 대한 말이 들려오지 않은 적이 없었고, 경주 근처의 여러 고을에서는 그 말이 더욱 심하여 저자거리의 아낙네와 산골짜기 어린 아이들까지도 동학의 글을 외며 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말하기를 ‘위천주(爲天主)’ 또는 ‘시천지(侍天地, 侍天主를 잘못 쓴 것; 인용자 주)’라고 하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한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사옵니다.(「정운구서계」,『비변사등록』, 1863(癸亥)년 12월 20일조)

이처럼 민중들은 사로잡았던 동학사상의 핵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 시(侍) 한 글자에 다 들어 있다고 감히 말하고자 한다.

동학은 우리 민족 특유의 민중적인 생명사상을 확고한 중심으로 하여 그 기초 위에서 유교, 불교, 노장(老莊)사상과 도교와 기독교 등 제 사상의 핵심적인 생명사상을 통일하되, 특히 민중적인 생명사상, 민중적인 유교, 민중적 불교, 민중적 도교와 민중적 차원에서 새로 조명된 노장사상과 선사상(禪思想), 민중적 기독교사상 등의 핵심적인 생명원리를 창조적으로 통일한 보편적 생명사상이다.(김지하,『남녘땅 뱃노래』, 1985, 110쪽)”  
 
위와 같이 김지하에 의해, 제(諸) 사상의 핵심적 생명사상을 민중적 기반 위에서 창조적으로 통일한 보편적 생명사상으로 평가받고 있는 동학의 핵심사상은『동경대전』에 집약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일명「동학론(東學論)」으로 불렸던「논학문(論學文)」 속에 집약되어 있다. 「논학문」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친히 제정한 21자주문(二十一字呪文)에 대해 상세한 해설을 하고 있는데, 21자주문은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주문(十三字呪文)으로 집약되며, 그것은 다시 ‘시천주(侍天主)’ 석 자, 마지막으로는 ‘시(侍)’ 한 자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학사상의 핵심은 바로 시(侍) 한 글자, 즉 ‘모심’이란 말에 다 들어 있다고 하겠다.

2. 동학조직에서 배워야 할 생명평화운동의 조직

<동학의 조직에 눈을 떠야 할 이유>

“동학이 포접제(包接制) 원리를 기초로 한 매우 유기적이고 세포론적인 조직 활동을 벌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동학사나 해월 행장을 보면, 당시 동학의 조직자들은 지목(指目)과 탄압을 받아 붕괴되는 지역조직, 위태롭고 취약한 조직, 그리고 사람이 갇히고 흩어져버린 조직들을 수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학조직의 특징 중의 하나는 연비제(聯臂制, 淵源制라고도 함; 인용자 주), 즉 알음알음, 친척, 가족, 특히나 통혼권에 의한 사돈 간의 관계(‘처남포덕’이란 말에 주목할 것; 인용자 주)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위험이 닥칠 때는 바로 이런 연비를 끊어버리며 그와 연비된 사람을 다른 곳으로 이사시키거나 피신시켜 버립니다. 동시에 갇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뇌물을 쓰든 포졸이나 옥졸들과의 교분을 터서 빼내든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빨리 석방시키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는 일이 허다했다는 기록이 도처에 보입니다. 구명을 위한 빈번한 모금지시의 (사발)통문들과 주초어육(酒草魚肉)을 금함(1892년 1월 25일자의 어육주초를 금지하는 통문 등; 인용자 주)으로써 저축된 돈을 석방자금으로 사용하는 숱한 사례들(서장옥이 옥에 갇혔을 때 석방자금을 마련한 사례; 인용자 주)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중의 일반적인 인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안을 위한 긴급조치로서 동학이 우리 민중의 일반적인 생활태도와 세계에 대한 태도 또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태도, 또는 공동체적인 생활태도 속에 들어 있는 기초적인 삶의 세계관, 산 사람들의 세계관, 생명의 세계관을 종교로 또는 사상으로 조직적인 공동체 삶으로 고양시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든 갇혀 있는 사람을 빼낼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되어 있는 연비를 끊어버리고 일단 피신시키는 이런 조직 활동은 고금동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매우 탄력 있고 유기적이며 기동력 있는, 그리고 살아 생동하는 민중적 조직 운영의 빛나는 사례라 할 것입니다.”(김지하,『남녘땅 뱃노래』, 1985, 183-184쪽)

<동학조직론의 핵심 1: 연원제와 포접제>
연원제---인맥 중심의 비밀조직
포접제---접포제라 해야 맞다
         접(接)과 포(包)  

<동학조직론의 핵심 2: 법소와 도소>
법소: 중앙본부
도소(집강소): 움직이는 도소

3. 사회적 실천을 위한 준비과정(해월 선생의 역할을 중심으로)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 선생님과 비교되는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선생님의 동학사상의 특징, 또는 동학포덕 및 발전과정에 있어서의 역할, 동학사상의 사회적 실천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의 역할은 무엇일까?
수운과 해월, 두 분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공적(公的) 활동기간에서 오는 차이다. 수운 선생은 1860년 4월에 도를 깨닫고 나서 1864년 3월까지 만 3년간 활동하셨고, 해월 선생은 1861년 6월에 동학에 입교하여 1898년 6월 처형되기까지 만 38년간 활동하셨다. 수운 선생은 동학의 집을 짓는 데 그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면, 해월 선생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올려 집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의 역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학사상을 실천적으로 사회화하였다.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사회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모든 사람을 하늘님으로 모시고 받들도록 했다.(人即天이니 事人如天하라, 天地萬物이 莫非侍天主니라)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을 모두 하늘님으로 모시고 공경하도록 했다.(物物天이니 事事天하라 ⇨ 三敬思想; 敬天, 敬人, 敬物)
둘째, 1864년 3월에 수운 선생께서 순교한 이후, 그리고 1871년 3월에 이필제(李弼濟)가 경상도 영해(寧海)에서 주도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종래는 이필제란으로 불렀다)’으로 인해 무너진 동학조직을 재건하여 전국 조직화하였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38년간의 지하포교 활동을 통해 경상도에서 창도된 동학을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 평안도 등 전국으로 확대하였다.(六任制의 시행, 包接制의 완성, 法所와 都所 설치 운영 등)
셋째, 비밀포교지를 근거지로 하여 동학의 지도자를 대거 양성하였다. 경상도의 경우, 영양 일월산 아래 용화동 윗대치(上竹峴)를 중심으로, 강원도의 경우에는 정선군 고한읍에 있는 정암사의 부속암자 적조암을 중심으로, 충청도의 경우는 공주 마곡사의 부속암자 가섭암을 중심으로, 전라도의 경우는 익산 미륵산에 있는 부속암자 사자암을 중심으로 핵심인물을 대동하고 49일간의 수련을 함께하면서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경상도 - 강시원, 편보언 등, 경기도 - 이종석, 이종훈 등, 강원도 - 김연국, 유시헌, 김병내, 임순호 등, 충청도 - 손병희, 손천민, 서장옥, 성두환, 김성지, 권병덕, 박인호 등, 전라도 -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전봉준, 김낙철, 김낙봉 등, 황해도 - 오응선, 김구 등)  
넷째, 수운 선생의 일대기를 문집으로(1879년), 그리고 수운 선생의 말씀을『동경대전』(1880년, 강원도 인제 갑둔리)과 『용담유사』(1881년, 충청도 단양 샘골) 등 경전으로 집대성하였다. 이 같은 경전집성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 이들은 모두 강원도 출신 동학지도자들이었다.(유시헌, 김연국, 김병내, 등)
다섯째, 이외에도 해월 선생은 일생 내내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정신을 실천하였고, 청수일기(淸水一器)로 대표되는 동학의 주요 의례(儀禮)를 확립하였으며, 사선(死線)과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삼남(三南) 지방을 포함한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며 지하포덕(地下布德) 활동을 중단하지 아니하였다. 해월 선생이 머물며 지하포덕을 전개한 장소는 현재 약 200여개소를 헤아리고 있다.
이상과 같은 해월 선생의 역할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1861년 6월 동학 입도로부터 시작하여, 1898년 6월 서울에서 처형되기까지 5천 년 우리 역사에서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으로 만들어 낸 동학사상을 사회적으로 널리 실천하였으며, 한국 근대 역사상 최고․최대의 민중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조직적 기반을 닦음으로써 영성과 수련, 사회적 실천의 전범(典範)을 보여주고 가신 분이라 할 수 있겠다.                

4. 동학의 사회적 실천과 현재의 생명평화운동

<다시 개벽을 향한 동학의 꿈>
동학이 꾸었던 꿈을 다함께 다시 꾸자.
“수운과 해월, 그리고 동학혁명에 가담한 모든 지도자들은 정착된 지역에 일정한 콤뮤니티를 형성하고 민중조직을 활용하여 복락을 누린 유례가 없다. 정착의 타락의 기회가 없이 끊임없이 ‘고비원주(高飛遠走)’하는 ‘도바리꾼’들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따라서 내홍(內訌)의 저주는 그들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내홍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두 종교교단이 조직된 이후의 사건일 뿐이다.” (김용옥,『도올심득 동경대전』, 통나무, 2004,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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