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명학연구원 대구 청소년 종합상담실

 

 

생명학 자료실

문서 자료실

 

 

 

 

 

 

2005/10/5(수)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통에서 본 채무 면제  
마빈 채니

이 글은 히브리 성서에서 증언한 부채 면제의 여러 형태들 중 하나만이라도 미흡하게나마 논의하려는 시도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얻은 빚에 이자 징수를 금지하는 일과, 부채 노비 금지 및 해방, 채무 면제, 채권자에게 빼앗기거나 전당잡힌 토지를 되돌려 받는 일, 채무자의 생필품의 상실이나 채무자를 학대에서 보호하려는 규정에 대한 자세한 분석들이 주로 이루어져 왔고 또한 앞으로도 다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의 상세한 부분들은 앞으로 나올 논의들과는­1차 문헌, 2차 문헌 모두­부분적으로만 연관된다.

오히려 나는 기본적인 질문을 하고 싶다:왜 채무 면제라는 독특한 전통(tradition)이 히브리 성서에 들어왔고, 심지어 강조되기까지 하였는가? 또 언제 그것들은 보도하는 모음(collages)이, 이자로 이득을 얻었으므로 채무 면제로 인해 타격을 입을 수 있었던 엘리트들의 작품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이다.

이 문제를 노만 갓월드(Norman Gottwald)를 기리는 기념 논문집에서 다룬다는 것은 세 가지에서 타당하다. 첫째, 이 주제에 관한 나의 관심은 우선은 그의 박학한 여러 글들 중 하나에 대해 공식적으로 응답하는 과정에서 자극 받게 되었다. 갓월드 교수의 많은 공헌 중에서 특기할 것이,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고 유용한 범주와 이를 연구하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는 능력이라 하겠다.

둘째로, 갓월드 자신은 히브리 성서에서의 채무 면제 전통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많이 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성서 세계에서의 채무에 대한 논의를 잉여 착출(surplus extraction)이라는 이중 제도의 배경에 두었다는 것이다. 국가 과세(state taxation)는 공납, 부역, 징세(금전 납세)를 통하여 자작농들의 경제적 여유를 실질적으로 좁혀 놓았다. 그와 동시에 국가 정책들은 몇 가지 우선적 곡물만을 집중적이고 전문적으로 경작하도록 압박함으로써, 전통적인 마을 농경(village agriculture)의 특성인 위험 분산(risk-spreading) 구조를 약화시켰다. 팔레스틴에서의 이런 형태의 농업은 주기적 가뭄, 역병, 병충해, 전쟁 등의 재난에도 시달렸다. 게다가 국가의 착출이 겹쳐 소생산자들은 살기 위해 국가 사업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은 특권자에게 빚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빚 문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정치 체제에서 잉여 창출 구조의 두 번째 연결 고리였다.

셋째로 비록 갓월드가 사회적 계층의 이러한 실체를 학문적으로 예리하게 보았음에도, 그는 이 논문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해 매우 유용하긴 하지만 보충적인 의미만 줄뿐이다. 그러한 분석적 범주는 농경 사회가 수직적으로 온통 계층화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엘리트 차원에서는 당파들이 수평적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성서의 팔레스틴에서 이러한 당파 엘리트라는 현상은, 팔레스틴 내부 지형과 국제적인 지정학적 위치에 의해 심화되었다.

지형적으로 팔레스틴은 많은 군(郡, canton)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군들은 다양한 자연 환경과 그에 따른 생존 수단을 나름대로 갖고 있다. 여러 종류의 농경 사회 중에서 특히 이런 지역화(balkanization) 성격을 갖는 농경 사회는 당파 엘리트가 생기기 쉽다. 일단 한 농경 국가가 생기면 각 지역은 그 국가에서 권력과 특권을 차지하려는 그 자체의 경제 구조를 갖게 될 것이다. 성서에서는 이런 현상에 대해 너무 많은 유명한 예들을 보여 준다.

게다가 더 광범위한 지정학적 환경은 당파 엘리트의 지형적 기질을 강화시켰는데, 성서의 팔레스틴은 그보다 더 인구가 조밀하고 강력한 사회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팔레스틴의 정치 경제에 초강대국이 끼친 영향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국가 지도자가 패망하거나 유배당하는 데서 시작되지는 않았다. 아주 예전부터 이들 초강대국은 자신들이 공공연히 지배할 수 있고, 자기들의 이익이 만나고 충돌하는 교착 지역에 위치한 이웃 국가들의 내정 간섭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배경에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기타 외국의 외교관들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여러 당파 엘리트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였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이스라엘은 공고한 국제 동맹을 통하여 국내적으로(domestically) 권력을 강화하여 가능한 한 독재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특정 동맹이라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기 마련이다.

채무 면제를 담고 있는 본문을 성서의 전승과 역사에서 이해할 때, 이런 당파 엘리트의 역학 관계를 알아야 광범위한 공시적(synchronic) 계급 분석에 거하여 중요한 통시적(diachronic) 차원을 제시할 수 있다. 인과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생계를 위해서 진 빚에 이자를 금하는 등의 채무자를 보호하는 성서 전승들이 왕정 이전 이스라엘의 공산사회적 가치에서 근원한다고 하면서, 이런 가치들은 그 이후 국가 지배의 시대와 전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존속되고 고수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고수와 존속의 메커니즘은 무엇이며, 이런 문학적∕역사적 특성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계급의 실체들을 포괄적으로 보는 분석은 당파 엘리트의 실체와 충돌하게 되지만, 이는 위의 질문에 더 깊은 답변을 허락할 것이다. 생존을 위한 대부에 이자를 금지하는 조항이 명문화된 전승의 최초의 자료는 농촌에서 발견되는 것 같다. 농촌에서 이자 없이 마을 이웃에게 주는 상호 보조하는 빚이 널리 나타난다. 이런 관행은 마을에서 위험 확산을 막는 방도이자 '보험 정책'의 하나였다. 그런데 국가를 지배하는 도시 엘리트

와 국가와 촌락 단위를 넘어서는 착출을 겪게 되면서, 이스라엘의 촌락 위원회는 도시 엘리트들에게서 생존을 위해 빚을 얻어야 했던 촌민(村民)들을 보호하고자 이 관습법을 확대하려 했을 것이고, 시공을 막론하고 빚에 시달리는 농민들에게 이 법 전통은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국가의 법적 장치를 장악한 엘리트들은 이 법 전통을 무시하거나 없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 성서에는 이 전승들이 여러 책과 문학적 충들 사이에 들어 있으며, 그것들 모두는 최종 형태상 엘리트의 작품으로 나타남으로, 계층 형태에만 집중해서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반면 여러 증언과 추론은 채무 면제라는 수단을 공식적으로 수용하도록 기능한 당파 엘리트간의 분쟁을 제시한다. 권력을 얻으려 하거나, 갓 집권한 당파가­잠정적이나마­부채 탕감을 받아들여 두 가지 이점을 얻었는데, 첫째는 현재 혹은 최근까지 집권한 당파에 대항하여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경제적 역학으로 경제적 파산 위기에서 몇 년 동안이나 동요하던 농민 계급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냈다. 둘째는, 최근까지 집권한 당파의 구성원들이 주로 국가 과세와 부채가 수반하는 잉여 착출이라는 이차적 연결 고리로도 이익을 얻었으므로, 여타의 부채 지불 조건 완화라든가 빚진 현물의 탕감을 옛 집권 당파의 경제적 기반과 경제력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일단 '개혁' 당파가 집권하고 권력을 장악하면 부채 완화라는 계획들은 실질적으로 시행되기보다는 공식적 언변으로만 찬양되는 경향이었다.

고대 세계의 채무 완화가 나타나는 여러 지역 및 시대의 증거들은 포고령(promulgation)이 정치 엘리트들을 위해 큰 역할을 했음을 말해 준다. 이 증거 중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바빌론 시대의 미샤룸(misarum) 자료와 그것들의 쐐기 문자 '법 전집' 사이에 추측되는 관계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충격적인 증거라 하겠다. 미샤룸 혹은 '정의'는 부채를 말소하고, 세금을 중지하며, 노예를 해방하고, 채권자에게 잡혔던 땅을 돌려 받고 여타의 경제적 부담을 면제하는 왕의 선포나 포고령에 포함되었다. 비록 미샤룸 본래의 본문이 고대 바빌론 시대에만 국한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거의 분명히 Isin과 Larsa왕국까지 소급되며, 또 Urkagina의 '개혁' 사례들에서도 윤곽이 나타난다. 그것들은 또한 고대 아카디아에서 후 바빌론까지 이르는 anduraru, 곧 "(상업적인) 부채를 면제하고", "(사적) 노예를 해방"하거나 "자유인에게 불법적으로 지워진 고용살이를 취소"하는 일을 증언하는 본문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비록 이런 본문의 후대 것 중 어떤 것들은, 특정 개인의 행위에 대해서 언급하고 왕의 포고령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련의 '면제'(release)에 대한 왕의 선포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증언되는 이 모든 증거의 핵심이 되고 있다.

이런 쐐기 문자 문서에 반영된 채무 면제 시책에서 왕의 주도성 이외의 다른 측면도 강조할 만하다. 비록 면제 행위들이 일반적으로는 다양한 '인종'이나 '민족' 집단을 포함했다고 해도,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이것은 확실히 부분적이며, 때로는 특정 계급, 특정 지역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실 이런 면제를 증언하는 문서들의 대다수는, 그러한 '사면'이 채권자의 특수 사정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채권자들에 의해 확인하는 데에 실질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미샤룸 행적은 관례적으로 왕의 치세 말기에 발생했으나 재임 기간이 수십 년인 왕들은 또한, 가끔 차후 몇 년 내에 '면제'를 선포하기도 했다. 비록 일부 학자들이 이런 법률 제정이 일정 간격을 두고 시행되었다고 주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 증거들은 이 주장을 지지하기는커녕 그 반대의 것만을 증거한다.

결국은 우리는 무엇이 메소포타미아 왕으로 하여금 채무 면제 선포를 생각하게 했을까를 물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면제'는 특히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 축적된 채무 부담이 경제, 사회, 정치적 질서를 위협했던 위기 상황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치자의 의도는 매우 계층화된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매우 심화된 불균형을 완화하고 경제적 평형과 자생력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왕이 질서와 기능적인 경제에 대한 실리적 관심 때문에 작업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하더라도, 더 면밀히 조사하면 다른 동기도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이 문서들의 문학적 배경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왕의 대중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수단'(spin)으로 '빚의 면제'를 사용하였음을 증거한다. 왕의 변명서(apologia)는 왕을 정의의 수호자, 약하고 억압받는 자의 옹호자로 서슴없이 내세웠던 것이다. 왕이 그의 피지배자(백성)들에게 이렇게 비춰질 때에 그는 국정을 장악한다. '면제 선포'가 함양한 정치적 합의와 왕의 이미지를 육성해야 할 필요는 새 왕이 통치하기 시작할 때에 가장 강하게 요구되었다. 오랫동안 왕위에 앉았던 왕들은 아마도, 가끔씩 자기 이미지와 국민 총화를 일신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동기들은 고대 바빌론의 미샤룸 선포 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에드자르드(D. O. Edzard)는 이러한 선포들의 목적과 그 보충 요소가 학문적으로 합치됨을 확언한다.

개인의 빚을 청산하고 일정 세금을 폐지하는 (모두 일시적이고, 계속적인 방편은 아닌) 국가 경제에 대한 왕의 개입은 이중의 목적을 갖는다. 개인이 막대한 부채 부담 때문에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보리에 대한 보통 이자율은 33.1 %이고, 은에 대한 이자율은 20 %였다), 그리고 일부 소유자에게 지나친 사유 재산이 모이는 것을 금하기 위해서였다.

에드자르드가 찾는 두 번째 목적은 이 논문의 이론적 시각에서 나타날 것이다. 미샤룸의 행위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적용되었으나, 왕들은 그 포고령이 적용되는 대상과 방법을 결정하는 법적 장치들을 상당한 정도로 통제했다. 그러므로 '면제'의 특정 목적은 왕이 부유하고 실력 있는 잠재적 경쟁자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들 선포의 시기는 그 목적을 또한 가능케 한다. 새 왕의 통치 초기에는 (1) 국가의 자생력을 위협할 만큼 과도한 경제적 악습을 개선하고, (2) 백성을 잘 돌보는 바른 정치가라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얻고, (3) 권력에 대하여 자신의 확고한 기반을 위협하는 당파 엘리트들의 힘을 약화시킬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선포 간격은 일정한 기간의 간격(numerical interval)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의 변화(vicissitudes of history)에 의거하였다.

증거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핑켈스타인(Finkelstein)의 주장을 방지한다­증거는 일정 간격을 나타내지 않는데도­.

이런 형식의 법령은 "아주 일정하거나 예상 가능한 간격을 두고" 나타났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또 왕들이 경고도 없이 아주 긴 기간동안 미샤룸을 선포하지 않았다면 대부자금(sources of credit)이 바닥나거나 몇 년마다 한 번씩 실질적 경제 활동에 마비가 일어났을 것이다.

신명기 15장 9-10절과 레위기 25장 26-27, 50-52절은 아주 확실히 이 주제에 관한 핑켈스타인의 도식(formulation)을 보여준다. 그러나 왕이 선포한 면제가 위에서 명시되었던 그 모든 목적을 위해 선택적으로 집행되었다고 한다면, 일상적 경제 활동이 마비될 이유도 없다. 오직 왕의 경쟁자나 정적의 경제적 위축이나 몰락만이, 실질적이며 추측 가능한 목적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도 채무 면제 시책을 시행하는 데에 정치 엘리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적절한 증거를 보여 준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자료와는 달리, 가장 잘 자료화된 증거는 왕의 지도력이 아니라 BCE 6세기 초 십여 년간의 집정관이었던 솔론의 집행력(archonship)에서 나타난다. 솔론 이전 시대까지 아테네는 부채 위기 상태였다. 부유한 소수는 더 부유해지고 소유지도 넓어지는 반면 아티카(Attica)의 소농장들은 급속하게 저당 잡히고 있었다. 결국 많은 수의 소지주들은 자기 땅을 잃었고, 땅이 없는 노동자인 헥트모로이(hektmoroi)들은 생존을 위해 진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로 (가끔 외국으로도) 팔리는 예가 많아졌고, 혹자는 이런 비운을 피하기 위하여 유랑하였다. 대중은 안정을 줄 독재자를 희구했고, 토지 재분배를 촉구하였다.

귀족 정치의 온건주의자였던 솔론은 독재와 토지 재분배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를 모두 반대하였는데, 대신 그는 일련의 채무 면제로 계급간의 갈등을 조정하려고 노력하였다. BCE 594년에 그는 이례적으로 입법권을 가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비록 아테네에 한했지만, 당연히 경제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현존하던 모든 부채를 취소했고, 그 이후의 부채 노예 제도 및 채무자의 신체를 담보로 하는 모든 형태의 저당이나 부채를 금지하였다. 가능한 그는 외국으로 팔린 모든 아테네의 채무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한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땅의 한계를 책정하였다. 국제 생필품 가격이 오르면 지방 인구에게 식량 공급을 원활하게 할 수 없으므로 올리브유를 제외한 모든 농산물을 아티카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경제 개혁에 대한 자신의 온건한 시도에 대해 솔론은 공공 여론을 형성하고 합의를 얻고자 팜플렛을 쓰고 살포했다. 그 시대의 기준에 따라 시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일부는 채무 면제의 양태들과 그들이 가진 강력한 정치적 대표성에 대한 이례적인 그리스의 변증의 용례로서 전래되었다.

솔론의 개혁은 큰 분쟁을 초래했다. 온건주의자인 그는 극소수의 아테네인만을 만족시켰을 뿐이다. 타격을 입은 부자들은 분노했고, 더 급진적 개혁을 바란 가난한 사람들은 만족할 수 없었다. 솔론이 집정관을 물러난 뒤, 곧 그의 노선을 찬동하는 해안당(the party of the Coast)과 그에 반대하는 평지당(the party of the Plain)으로 분열되어 실권을 쥔 정치 지도자들간의 당파 분쟁이 터져 나왔다. 이 분열은 단순히 계급적 노선만이 아니라 솔론의 시책 집행 상의 사소한 문제들 때문이기도 해서, 어떤 결정에 손해를 본 이들은 그 결정에 도움을 받은 자들과 대립하였다.

비록 메소포타미아나 그리스의 경우보다는 더 산만한 증거일지는 몰라도 고대 로마도, 당파 엘리트 사이의 분쟁과 채무 면제 법령 제정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 주는 예가 있다. 고대 공화정에서 보이는 채무 면제에 대한 증거는 대부분 지도권 투쟁이라는 배경에서 발생한다. 보렌(H. C. Boren)은 이러한 분쟁을 우리의 논의에 적절한 측면으로 간결하게 말한다.

역사가들은 가끔 그 분쟁을 평민들(the plebians)이 로마 귀족(the partician)에 대항한 전면적 봉기로 보아 왔으나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 '분쟁'의 지도자들이 평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가문들 출신이다. 그 싸움의 말미에 이들 지도자들은, 로마에 의해 흡수된 국가들의 귀족 정치 수뇌부가 되었다.

그 지도자들은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대중에게 확산된 경제적 요구를 지지했다. 그러나 브룬트(P. A. Brunt)가 말했듯이 "대중과 그들의 정치 지도자 사이에는 경제적 이해에 대한 일치는 없었고 단지 당시 형세에 의한 동맹만이 있었다." 위의 예에 대한 가장 짧은 요약도 보렌과 브룬트에 의해서 설명된 중요한 사실들을 설명할 뿐이다.

BCE 5세기초에 귀족들은 평민 출신 관리 호민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5세기 중엽까지 귀족들은 평민의 또 다른 요구에 응하였다. 예전에는 불문법이었던 법률 내용을 명문화하고 이를 12표법으로 널리 알린 것이다. 비록 12표법이 채무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반대하는 조항을 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법은 채무 이행을 안하거나 못하는 채무자들이, 채권자에 의해 외국에 노예로 매매될 법적 근거가 있다고 허용하고 있다. 12표법은, 소농민들을 계속해서 빚을 지게 하는 정치 경제 제도를 바꾼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대부 상환을 볼 때,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에게 예속되어 노동하는 가운데, 채권자가 채무자의 채무 불이행에 대해 법정에 청구하지 않고도 차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넥숨(nexum)이라는 유감스러운 계약이 있었다. 많은 부분의 공유지(public land)가 실질적으로 로마 귀족의 소유였다. 그런 상황의 결과로 12표법 제정 이후 수십 년은 땅의 분배와 부채 안정에 대한 촉구가 간헐적으로 존재했다.

이런 촉구가 BCE 367-366년 호민관 리키니우스(Licinius)와 섹투스(Sextus)의 주도로 대두되었다. 호민관 중 한 명은 평민이어야 하고, 한 시민이 소유 가능한 땅을 제한하고, 채무 불이행으로 인한 채무자 매매를 제한하며, 대부 상환의 기한 완화를 요구하는 법들이 통과되었다. 40년 후 BCE 326년에 넥숨(nexum)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채무 부담과 가혹한 처사가 없어졌으므로 낮은 계급들은 이 법으로 단기간은 이득을 봤겠지만, 현실은 다른 측면을 보여 주었다. 부채 상환 일시 정지에 대한 다양한 보고와 이자 지불 취소에 대한 보고는 그 안정이 짧았음을 보여 준다. BCE287년까지 부채 문제는 통치자로 호르텐시우스(Quintus Hortensius)라는 평민을 선출할 정도로, 다시 대두되었다. 넥숨(nexum)의 폐지는 채무자의 실질적 안정 여부보다는 더 엄밀한 법적 절차를 가져왔음이 분명하다.

반면 이 싸움의 진정한 승리자들은 부유하고 실력 있는 평민들이었다. 더 높은 관직을 얻고, 이를 통해 과두정치에 대한 결정권을 넓힐 방도를 계속 얻게 된 것이다. 12표법은 계급간 통혼을 금해 왔다. 그러나 계급 유착은 BCE 445년 평민들의 요구로 폐지되었다:"확실히 사회적 야망을 품을 만한 부유한 평민들이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많은 지참금 때문에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귀족들도 있었을 것이다." 모호한 상류 계급의 지위는 리키니우스(Licinius) 자신이 공유지 소유 제한을 위반하여 벌금을 물었다는 한 이야기에서도 설명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의 자료가 세부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이것들 모두 고대 세계에서 공식적 채무 면제를 옹호하는 일에 당파 엘리트가 중추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한 분석은 이쯤으로 하고, 이제 채무 면제를 보도하는 성서 전승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이러한 법령의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겠다.

연대순으로 고찰하여 보아서 첫 자료로는 출애굽기 21-23장이다. 이 "계약의 책"이 연대적으로 앞선다는 것은 인정되었으나 그 밖에는 동의된 것이 없다. 이 법률집의 성격, 목적, 장르, 저작, 시대 문제는 4경의 설화 전승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계속 논의해야 할 문제들이다. 지면 제한으로 다양한 입장의 의견들은 말할 수 없고, 대신 이 논문의 범주 안에서 우선적으로 선택된 것들을 서술해 나가겠다.

출애굽기 21장 1절-22장 17절(BHS, 16절)의 법률들이 E 저작의 절정이자 목적이라고 쿠트(R. B. Coote)가 논증한 주제를 우선 이야기해야겠다. 쿠트에 의하면, E는 결코 갈라져 나간 전승 줄기가 아니라, 북이스라엘 지역이 다윗 가문과 결별한 후 여로보암 1세의 통치를 합법화하려고 고안된, J에 대한 논쟁적 개작(recomposition)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쿠트의 전제는 출애굽기 21장 1-11절의 "계약의 책" 서두로 나오는 부채 노예의 해방법들의 위치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고대 근동의 다른 노예법들은 이와 같지 않다. 고대 근동의 법률 모음집의 노예법들은 다른 항목 밑으로 분산되거나 뒤로 밀려난다. 법률 포고(promulgation)에서 대략 법적 선례를 따랐을지도 모르는 여로보암 1세는 부채 노예법들을 서두에 둠으로써 계약을 강조하였다. 그렇다고 여로보암의 의도를 그 역사적 정황과 구별하기 힘든 것도 아니다. 북쪽의 촌락민들은 솔로몬의 경제 정책으로 거의 수세에 몰렸고, 부채 노예는 많은 이들에게 불운한 것이었다. 여로보암은 다윗 가문에 대한 대중적 반감으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자신이 소농민 대중의 곤궁(plight)을 감지한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으니, 그는 그들의 분노를 달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 소농민의 지지만으로는 그가 권력을 장악하기에, 충분한 기반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영토에는 땅의 소유한 북쪽 지파 가문들과 그들을 이끄는 실력자들과 사제들, 그리고 그들에게 제의적 합법성을 주는 성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여로보암은 통치를 위해 이들의 지지를 필요했는데, 그러기 위해 최소한 부분적이라도 당파 경쟁자들과의 분쟁을 봉쇄하고 실력자들의 전통적 권위를 승인해야 했다. …그러므로 몰락한 촌민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된 부채 노예제에 관한 그 법이 또한 부채 노예들을 데리고 있던 사람들의 권리를 "합법적"으로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여로보암과 그가 비위를 맞추던 북쪽 지파의 실력자의 임원회(courts)는, 다윗 가문에 대한 충성으로 이득을 얻은 채권자들에 대하여 부채 노예 계약은 불법이라고 재빨리 선포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정치 경제적 사업들은 다윗 가문에 편드는 사람들이 "잉여 산물"의 대다수를 대부할 수 있도록 했으므로 예루살렘에 근거를 둔 채권자들에게 여로보암이 채무 면제를 부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자신의 정적의 권리를 빼앗고 그가 신경 써야만 했던 높고 낮은 지지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나타나는 부채 탕감에 대한 E의 전통은 예후 시대에 다시 나타났을 것임이 거의 분명하다. 왕권 침탈과 유혈에 근거해 집권하였기에 예후는 군대, 토지 점유자, 예언자 당파들과 불만에 찬 농민들이 하나로 뭉치게끔 조치를 취하기 위하려 그는 오므리 가문에 반대하고 야합을 "북왕국의 솔로몬"으로 일축하면서, 자신을 이들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한 단락으로 나타나는 출애굽기 22장 25-27절(BHS, 24-26절)은 "계약의 책"에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간주되어 왔다. 비록 그 연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쿠트는 그것이 히스기야 시대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부채 탕감이라는 이 논의는 지금까지 우리가 숙지한 사회-역사적 패러다임에 들어맞는다. 히스기야는 앗시리아 제국주의의 약탈로 퇴색해 버린 다윗 왕조의 존귀와 실권을 회복하려 했다. 유다의 전통적인 지역의 영향을 받은 권력 브로커들은 히스기야의 정책에 걸림돌이 되었다. 멸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북이스라엘 지역에서 히스기야는 자신의 세력 확장을 시도했으나, 그곳에서는 앗시리아에게 비호를 받는 외국 엘리트들이 또한 방해가 되었다. 앗시리아를 막는 데 쓰는 비용이나 앗시리아에게 바친 비용은 모두 두 지역의 자영 농민을 파산시켰다. 히스기야 법령 선포와 생존을 위한 대부라는 마을의 전통적 규범을 선택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지역 패권 장악에서 라이벌이었던 그 채권자들을 약화시킨 반면, 양 지역에서 억압받던 자영 농민에게는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했음이 분명하다.

신명기 15장 1-18절, 23장 19-20절(BHS, 20-21절), 24장 2, 10-13, 17-18절의 율법 선포의 배경이 분명한 요시야의 "개혁"은 히스기야 시대의 특성과 연결되는 역학 관계에 있다. 앞에서 말한 요소를 반복하기보다는 요시야의 배경에서 부채 탕감이 갖는 특별한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기로 하겠다.

앗시리아의 영향력 타파를 위해 요시야는 히스기야가 거절했던 한 노선을 선택했는데, 이는 북왕국 멸망 후 앗시리아의 정책으로 그곳에 들어온 외국 엘리트의 후손을 앗시리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요시야는 심하게 분열된 유다 엘리트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당파 분쟁으로 암살되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런 소름끼치는 사건은 앗시리아의 제국주의가 수십 년 간 다윗 가문의 권위(prestige)를 말살시킨 결과였다. 왕실 금고로 들어오는 수입과 예루살렘의 왕실 제의(royal cult)는 최소한 왕실의 이미지만큼이나 감축되는 고통을 겪었다. 요시야가 완전한 성인이 되었을 때와 앗시리아 세력의 후퇴가 동시에 이루어진 무렵, 그는 은둔해 있던 지방의 여러 지역의 실력자(magnates)들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합법적으로 인정해 주고 헌금을 모금하는 성소들이 중앙 집권적 왕권을 활성화하려는 그의 정책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이전의 북왕국 지역에서 실재했던 현상이었는데, 바로 거기서 요시야는 3세기라는 시간이 경과한 후 다윗 가문의 실권을 재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민족주의, 정치 종교적 중앙 집권화; 다윗 왕권의 왕실 예배를 '정화'하고 회복; 지방과 지역, '외국'의 예배들과 그 요원을 축출; 영토 확장; 확대된 궁중을 변증하는 일; 왕의 율법 선포라는 요시야의 개혁의 모든 측면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채무 면제의 법전통은 정적들을 약화시켰다. 자기 입장이 확고한 여러 정적을 대가로 자신의 권력 확장을 꾀하는 왕은, 자기 국민의 다수인 빚에 시달리는 자작농들에게 다시 매달릴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요시야 바로 전 시대의 정치 경제적 역학 관계, 그 지역의 '잉여 산물'의 일부를 중앙 집권적 왕권 수립을 반대하는 (지방의) 실력자들과 사제들에게 바치게 하였는데, 관할 구역과 징세 기반(tax base)에 대한 왕의 경쟁자들은 주로 이러한 채권자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시야의 지배권 하에서 시행된 채무 면제는 요시야에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주었는데, 다수인 평민들의 인심을 얻고 동시에 중앙 집권적 왕권을 재확립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경쟁자와 정적들을 약화시킨 것이다.

비록 예레미야 34장 8-22절이 신명기 15장 1-18절과 분명히 관련된다고 해도, 모든 성서 본문이 앞서 논의하던 대로 채무 면제에 대한 왕의 율법 반포에 대하여 보도하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이 본문의 부채 노예들의 해방에 관한 법들과 복잡한 문학적 관련성에 대하여 합의하지 못했고, 또 시드기야 시대에 노예 주인들의 행동의 동기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의에 이르지도 못했다. 이 논문의 취지로 보아 예레미야 34장 8-22절은 집권자인 몇몇 계급들이(비교 9절) 자신들이 소유한 할당 이자에 대한 변하는 징수 권리를 보호하고자 부채 탕감 전통을 교묘히 이용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증언한다고 할 수 있겠다.

레위기 25장 8-55절은 부채 탕감법과 관련하여 볼 때, 복잡한 문학적 합성체이다. 출애굽기와 신명기 본문처럼 율법 반포에 파당 분쟁과 왕권 형성을 개입시키지 않더라도, 이 법의 관심은 땅과 자작농의 소산과 제의에 대한 지배권을 다투는 한 사제 엘리트를 증언한다. 레위기의 일부가 형성된 특정 배경이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제작) 동기에는 없는 어떤 특성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49년 혹은 50년이라는 '희년'의 주기는 다른 곳에서 적용된 7년이라는 '안식'의 주기에 대한 첨가라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다윗 가문이었던 세스바살이 인도한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첫 포로 귀환이 BCE 538년 고레스의 칙령이 있은 후 가능한 한 빨리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면, 그들의 팔레스틴 도착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정치적 사제적 엘리트의 뒤이은 추방 후 49년째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들은 귀환 후에 자신이 차지했던 권력의 공백이 메우어졌음을 발견했다. 그 반세기라는 세월의 기간은, 지방, 지역의 실력자들과 그전에는 예루살렘에 속했던 토지와 경작자들에 대한 지배권을 합법화하는 제의를 키워 놓았던 것이다. 귀환자들은 토지와 농민과 그들이 새로 수립한 제의에 대해 충성하도록 붙잡기 위해, 힘든 투쟁을 하게 되었다. 자작농과 경작자의 관심과 정신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중에서 부채 탕감 전통이 유력한 무기임이 증명되었다. 50년은 거의 모든 자작농들이 그 현장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실력자들에게 무거운 빚을 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귀환자들이 채무 면제의 전통을 지지함으로써 자작농에게 공감을 주었을 것이고, 만일 실행되었다면, '면제'는 그에 연루된 채권자에게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포로였다가 귀환하게 된 사제 집단은 이 정책에 대한 그들 나름의 이념적 정초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포로였을 때 그들은, 현재 사제 4경(Priestly Tetrateuch)으로 알려진 경전을 만들었다. 이것의 특징이 바로 안식일이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으므로 한 주 중에서 가장 신성한 이 일곱째 날은 모세 계약의 중요한 표지이기도 했다. 그 계약의 율법이 이미 '안식년의 해방'을 내포했다면, 소중히 여기던 성전이 파괴되던 시기와, 성전 재건과 지배권 확립을 위해서 채무 면제를 시도하던 이 시기 사이에서, 종교적 상징의 대가들(masters of religious symbolism)은 "7년의 일곱 번"이라는 상징적인 위력을 그리워하지 않았겠는가?

이런 논의가 일리는 있지만, 순전히 이론적인 것이라 것이라면, 느헤미야 5장 1-13절 10장 31절(BHS, 32절)의 특정 배경은, 포로기 이후 팔레스틴의 당파 엘리트 간의 동일 경쟁에 대한 후대의 개작이다. 느헤미야는 귀환자들의 이익과, 페르시아 제국 서부 지역(western flank)을 강화하기 위해 그를 보낸 페르시아의 군주의 이익 모두를 대변해야 했는데, 그가 맹렬히 비난했던 '귀족'과 '관리'들(느 5:7)은 지역 패권에 대한 경쟁자였고, 이들은 아마도 페르시아에 눌려 있던 에집트, 그리스의 핵심 세력과 공감대 혹은 연결 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대다수의 자작농들은 그들 틈에 끼여 있었다. 채무 면제에 대한 느헤미야의 독단적 수용은 그리스의 전제 군주 형태에 흔한 고상한 변명(classical apologia)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의 예들은 모두 심도 있는 주해를 필요로 하지만, 히브리 성서의 부채 탕감이라는 전통은 경쟁 엘리트 당파간에 지배권을 놓고 투쟁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에 의해 공포되었다. 고대 세계 도처의 비교 자료들은 이러한 결론을 확증해 준다. 왜냐하면, 당파 엘리트 협상은 지역적인 특성이었기 때문에, 부채 탕감이라는 문제에 대한 다양하고 복잡한 성격을 성서에서 예상할 수 있다. 비록 가장 진심 어린 좋은 의도를 가진 '개혁' 엘리트들이 관여하는 경우라도, 한 사회 계급으로서 분투하는 자작농들을 만족시켰던 긴 시간의 구제책은 드물었다. 각 세대마다, 신흥 엘리트들은 부채 탕감이라는 방도를 선포할 동기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각 세대마다 자작농들이 농경 사회의 구조로 인해 빈곤과 부채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러한 사회적 구조의 근본적인 변혁만이 근원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름   메일   회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수정/삭제     다음글    
번호제 목첨부작성일조회
30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통에서 본 채무 면제   2005/10/05(수)  20129
29   희년과 경제 정의   2005/10/05(수)  27699
28   한국 여성의 한에 대한 상담과 치유   2005/10/05(수)  20730
27   분단 한국에 있어서의 민중의 한   2005/10/05(수)  11338
26   가톨릭교회의 커뮤니케이션 정책   2005/10/04(화)  10041
25   WACC의 커뮤니케이션 정책   2005/10/04(화)  23238
24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고찰   2005/10/04(화)  11557
23   커뮤니케이션 신학   2005/10/04(화)  8843
22   기독교와 제 종교   2005/10/04(화)  14514
21   동서철학의 비교   2005/10/04(화)  8214

 
다음       목록 쓰기

  

 


한국생명학연구원